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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통영 2 (統營 2)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장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가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 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山)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갓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客主)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갓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든데 명정(明井)골은 산(山)을 넘어 동백(冬柏.. 2021. 5. 26.
백석 - 통영 1 (統營 1) 녯날엔 통제사(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港口)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嬉)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시 사랑하다죽는다는 이 천희(千嬉)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客主)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맞났다 저 문 유월(六月)의 바다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나는 비가 날였다 2021. 5. 26.
백석 - 국수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면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 2021. 5. 26.
백석 - 노루 장진(長津) 땅이 지붕 넘에 넘석하는 거리다 자귀나무 같은 것도 있다 기장감주에 기장차떡이 흔한데다 이 거리에 산골 사람이 노루 새끼를 데리고 왔다 산골 사람은 막베 등거리 막베 잠방둥에를 입고 노루 새끼를 닮았다 노루 새끼 등을 쓸며 터 앞에 당콩 순을 다 먹었다 하고 서른닷 냥 값을 부른다 노루 새끼는 다문다문 흰 점이 박히고 배안의 털을 너슬너슬 벗고 산골 사람을 닮았다 산골 사람의 손을 핥으며 약자에 쓴다는 흥정 소리를 듣는 듯이 새까만 눈에 하이얀 것이 가랑가랑한다 2021. 5. 25.
백석 - 여승(女僧)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2021. 5. 25.
백석 -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 2021. 5. 24.
백석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2021. 5.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