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도리 한겨울 내 키만큼이나 긴 그대 팔을 두르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립니다 내 품 속에서 포근히 잠든 그대를 두 팔로 꼭 끌어안고 오지 않는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와 함께 였던 따듯한 겨울을 기다립니다 2021. 5. 16. 구름운(雲) 고즈넉이 안개 낀 산마루를 보며 아버지는 새해를 맞습니다 겨울 농촌의 아침은 으스스한 옷을 걸치고 불을 지피러 가는 일 신문지에 불을 붙여 아궁불 드리우면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나고 어느새 내리는 눈은 흰나비처럼 나풀거려 쪼그리고 앉아 멍하니 불을 지키는 아버지 아버지, 요즘은 좋아하던 텔레비도 흐릿해져 누워서만 듣는다지요 아들 졸업식날 맨 뒷자리에 말없이 서 계시던 아버지 연신 지 살을 떼어주는 줄도 모르고 내리는 저 눈처럼 아무도 오지 않는 눈길을 아무도 오지 않는 길목을 하염없이 쓸고 계시는 아버지 점점 피어오르는 눈안개 속으로 흐려져가는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구름처럼 부풀어올라 먹먹해져 갑니다. 2021. 5. 16. 서시 나는 세상에 흩어진 파편들로 글을 쓴다 내 글에는 어떠한 운율도 색깔도 없다 맛도 향도 사상도 없다 다만 계속해서 쓸어 담을 뿐, 한 가지로 정의되지 않는 그런 그리하야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무명의 존재로 무덤에 간다 그곳은 나만의 곳이다 내가 읽었던 자들이 있는 곳 영원히 살아 숨 쉬는 곳 비유가 마구 샘솟는 곳 나는 자주 죽는다 그리하야 한 장씩 복사-붙여 넣기를 한다 죽는 날까지- 날 읽기 시작한 나에게 영원히 끝나지 않는 무덤을 마련해두고 하나의 소재로 누군가의 가슴에 달리는 펜던트처럼 나는 계속 나를 쓴다. 2021. 5. 16. 겨울, 현관문을 열며 겨울, 현관문을 열며 낙엽 몇이 춥다며 따라 들어옵니다 멍멍이는 반갑다며 꼬리를 흔들고 창문 턱에 양이는 새근새근 잠이 들었습니다 그 아래 가지런히 놓인 화분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있고 거실 쪽에 붙어 몸을 녹이는 신발들 그 옆에 나란히 내 눈 덮인 신을 벗으며 조용히 거실문을 엽니다 두툼한 이불속에 몸을 집어넣고 익어가는 동치미 무수알처럼 다 함께 둥글게 모여 앉아 티비를 보는 식구들 나는 그 속으로 달려가 푹- 하고 발을 밀어 넣었습니다 1998년 겨울 어느 산골마을에 느릿느릿 눈이 내리는 가운데 거실 창으로 새어 나오는 구수한 불빛에 푹- 푹- 익어가던 시절 어린 나로부터의 추신. 2021. 5. 2. 담쟁이 올해는 아무도 찾지 않는 장례식장이 호황이었다 주가는 치솟았고 자영업자들은 줄줄이 망했으며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그 벽앞에서 무너지기 일쑤였다 단단히 서로의 손을 잡고 견디는 저 담쟁이처럼 묵묵히 한단씩 벽을 오르다보면 언젠가 막막했던 저 벽도 누구나 쉬- 넘을 수 있듯이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이 겨울을 이겨내야만 한다 한 뼘 더 자라기 위해 손을 뻗는 저 담쟁이처럼 조금씩 한사람씩 손을 뻗으면 언젠가 막연했던 저 벽도 누구나 쉬- 무너뜨릴 수 있듯이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한발씩 이 어둠을 헤쳐나가야만 한다 도종환 담쟁이 인용 2021. 5. 2. 보리차 어느새 날이 많이 추워진 듯합니다 그곳은 여기보다 더 춥겠지요 도시는 눈이 많이 내렸음에도 도로 위에 차들로 가득합니다 너무도 많은 일들과 너무도 많은 사람들 너무도 많은 불빛과 너무도 많은 뉴스들 너무도 많은 집들과 너무도 많은 음식들 이곳의 하루는 더부룩하기만 합니다 화려한 도시를 지나 비슷한 방들로 이어진 통로를 지나 철제문을 열고 들어서면 차갑게 식어있는 단칸방과 어제 먹다 남은 인스턴트 음식과 페트병 속 반쯤 남은 생수와 나 오늘같이 추운 날이면 속 따스히 뎁히라며 책상 위에 올려놓으시던 보리차 모락모락 김이 나던 어머니의 보리차가 생각납니다 늦은 시간까지 우리를 기다리시던 피-소리를 내며 끓는 주전자 속 금빛으로 물들던 훈훈한 보리알처럼 아랫목에서부터 솟아나는 어머니, 어머니의 따듯한 보리차가.. 2021. 5. 2. 눈의 색깔 3 그리고 추운 겨울 눈이 흰 이유는 당신의 빨개진 볼과 차가워진 손을 보기 위하여 그 손을 잡고 내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서 매서운 눈보라 속을 나아가기 위하여 추운 겨울 흰 눈이 내리네 우리의 사랑은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 두터운 이불로 된 하나의 색동옷을 입었네 삼신할미가 점지해준 사랑 흰 속싸개에 쌓여 이 겨울 포근한 불씨 하나를 얻었네 어떠한 추위가 와도 우리는 따듯하다네 그리하여 나는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2021. 5. 2. 눈의 색깔 2 그리고 뉴스에서는 올해 한 번도 눈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눈은 오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상관없이 어느 날에는 환하게 웃다가 어느 날에는 구석에 쌓여 울어 또 어느 날엔 신나게 말을 걸다가도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너 한 해가 다 가도록 연락도 없더니 불현듯 나타나 내 앞에 서있던 너 처음 너와 눈을 맞고, 너와 입을 맞추고, 너와 이불을 덮고, 너와 녹아내려 몇 날 며칠을 보내어도 부족했던 시간을 지나 네 눈 밖에 난 후로 나의 뉴스에서는 계속 눈이 오고 있다고 아무도 볼 수 없는 눈이 오고 있다고 이 내리는 눈은 나만 맞을 수 있다고 나의 뉴스에서는 올해 계속 눈이 오고 있다고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상관없이 투명한 눈이 오고 있다. 2021. 5. 2. 눈의 색깔 1 그리고 소녀는 거침이 없다 오렌지, 수박, 키위, 따위를 집어넣고 새침하게 시작버튼을 누른다 달콤한 시럽 한 스푼과 시린 얼음 몇 조각이 뒤섞인 이 보잘 것 없는 인생 사정없이 믹서기는 돌아간다 6,300원짜리 명세표와 지루하게 늘어놓는 변명들 여유로운 표정으로 탁탁탁 순식간에 완성되는 아침 "손님, 오색 눈송이 한 잔 나왔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아무렇지않게 웃는 소녀의 얼굴을 뒤로 하고 카페문을 나서자 흔들리는 풍경소리, 들이치는 눈보라와 새하얀 아침을 맞는 오늘 온 세상 색이 이 한 잔의 눈송이에 잠겨 추운 겨울 눈덮인 거릴 걷는 나. 2021. 5. 2.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