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마이너스 일 걔 결국 프리지아 들고 떠났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면서 청색 마이를 날리면서 교문을 넘었대 어른이 되고 싶어서 도서관 구석에서 책 뜯어먹던 것부터 걔가 꾸던 꿈을 생산하고 싶어서 따라다닌 것도 이해 해. 하지만 이렇게까지... 난 걔 등뒤에서 연분홍빛 수국으로 물드는 노을을 봤어 회색 백팩 지퍼 틈으로 삐져나와있는 푸른 잎도 봤지 걔는 말했어 새벽마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넣고 다닌다고. 이해 해, 다 이해한다구. 하지만 너도 알잖아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걔는 그저 꿈을 꾸는 공상과학자일뿐이야. 나는 믿어. 걔는 특별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스스로 정한 일에는 책임을 지는 아이니까. 그렇다고 너까지 떠나는 건 아니잖아. 아니. 나는 여기서 배운 것보다 걔와 함께했던 시간에서 배운 게 더 많아 인생은 우리.. 2021. 9. 1. 수저 탕 탕 탕 탕 탕 탕 쉼 없이 불꽃이 인다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터지고 찌그러지고 휘어지면서 침묵의 총대 하나가 서있다 언제부터 이리도 치열한 쇠뭉치였던가 뜨거운 세상 속에 홀로 내던져져 타들어가는 목마름으로 꿈을 갈망하였다 탕 탕 탕 탕 탕 탕 끝없이 반복되는 망치질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벗겨내고 수차례 맑은 물로 얼굴을 씻겨내면 더 이상 마모될 곳 없는 순고한 사나이 세상을 둥글게 바라볼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밥상 위에 수저 하나가 늘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뱃속에 따듯한 밥 한 술 떠넘기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탕 탕 탕 탕 탕 탕 오늘도 쉼 없이 불꽃이 인다. 2021. 7. 18. 꽃 하늘 높이 손을 뻗어 그대를 향한 이 마음 사방으로 피었네 그대가 온다면 아무런 꿈이라도 좋으련. 2021. 6. 30. 고양이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길고양이에게 참치캔을 주고 있던 편의점 알바생의 안경 너머로 내가 들어왔다. 잠시 후 참치캔 하나를 더 갖고 나왔다. 2021. 6. 26. 월요일 밤부터 혼났다 1 정수기에 물통을 꽂아놓고는 접시를 닦는 점원과 접시를 정리하는 점장님 - 곧 물통에 물이 넘칠 것 같습니다만 불안한 세상 세상이 조각나 있어 계속 한쪽 눈을 비비는 현상 지금 여기는 같은 말이 같은 말을 만들고 같은 행동이 같은 행동을 만들어내는 회식자리 - 술에 취한 것일까요 - 정말 취한 것일까요 - 봄이 오고 있다는데 - 이 설원 한 잔때문에 - 겨울이 가는 건 아니겠죠 카드의 숫자들이 줄어 줄어든 만큼 나이가 늘어 직급이 높아질수록 착해져야 하는 이유와 취할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와 회식자리가 줄어들수록 자리를 늘리려는 이유와 술이 느는 이유 - 늦었습니다 - 이러다 막차를 놓치겠어요 - 저는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 달립니다 지하철을 타야 합니다 2 늦은 시간 지하철에는 사람들이 많아 의자 .. 2021. 5. 16. 진지한 젊은이 자신의 몸보다 큰 의자에 앉아 꼬마가 웃으며 물었다. "젊은이여, 그대는 무엇에 위해 그리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가?" 빛이 들지 않는 높은 칸막이벽 아래 희미한 전등불이 비추고 그 아래 침침한 모니터 화면 속으로 수십 개의 프로젝트 폴더를 아래로 밀어 멈추지 않는 타자기 아래로 놓인 수백 개의 의자들 밑에 쩌든 슬리퍼가 어지럽게 침전하는 무의미한 시간들 다 버려진 것이다, 젊음은. 아무리 일을 하고 술을 마셔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아 목표는 업무를 줄이는 것 가끔 심장이 답답해지면 피난계단으로 피해 쭈그려앉아 한약을 먹어 아침마다 약을 먹어 약통을 늘려 병원에서는 아프다는데 아픈 지 도통 모르겠어 웃을 일을 만들기 위해 돈을 벌어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웃음을 잃어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웃음 이젠 돌.. 2021. 5. 16.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안고 뽀뽀하고 멈출 수가 없어 너와의 저녁 시간 너는 내 손가락을 먹고 코를 깨물어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너와의 시간 허리가 나가고 팔이 떨어질 것 같아도 네가 한번믄 웃어준다면 그 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 너는 나의 미래야 너는 나의 바다야 너는 나의 희망이야 매일 같은 노래를 불러도 매일 같이 춤을 추어도 네가 한번만 웃어준다면 그 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 너는 나의 미래야 너는 나의 우주야 너는 나의 사랑이야 내 모두를 주어도 아깝지 않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 너는 나의 미래 나의 바다 나의 우주 너는 나의 희망 나의 사랑 나의 아들 눈이 넣어도 아프지 않아 2021. 5. 16. 구름운(雲) 고즈넉이 안개 낀 산마루를 보며 아버지는 새해를 맞습니다 겨울 농촌의 아침은 으스스한 옷을 걸치고 불을 지피러 가는 일 신문지에 불을 붙여 아궁불 드리우면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나고 어느새 내리는 눈은 흰나비처럼 나풀거려 쪼그리고 앉아 멍하니 불을 지키는 아버지 아버지, 요즘은 좋아하던 텔레비도 흐릿해져 누워서만 듣는다지요 아들 졸업식날 맨 뒷자리에 말없이 서 계시던 아버지 연신 지 살을 떼어주는 줄도 모르고 내리는 저 눈처럼 아무도 오지 않는 눈길을 아무도 오지 않는 길목을 하염없이 쓸고 계시는 아버지 점점 피어오르는 눈안개 속으로 흐려져가는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구름처럼 부풀어올라 먹먹해져 갑니다. 2021. 5. 16. 리시안셔스 낡은 빌딩 아래 지하궁전 어둡고 침침한 불빛 아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보이는 유리 상점 겹겹이 서로를 안고 의지하는 꽃들 사이로 영롱히 빛나는 꽃, 리시안셔스 그리웠던 그대를 만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버티었던가 오-나의 리시안셔스 그대의 환한 얼굴이 언제 이렇게 주름졌던가 어느 악마의 실수인지는 모르나 그대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소 자- 어서 내 손을 잡으시오 리시안셔스 나 그대를 이 지옥같은 지하감옥에서 탈출시킬 것이니 나 여기 한 다발 사랑의 주문을 외우오 그대여 이 마르지 않는 유리병에 발을 담그오 저기 이름 모를 야생초들이여 나의 리시안셔스와 함께해주겠소 나 여기 한 다발 사랑의 대가를 치르니 지하 세계를 지키는 간수들이여 길을 열어주시오 나 그대를 품에 안고 집으로 가 둥근 식탁에.. 2021. 5. 16. 이전 1 2 3 4 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