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마이너스 일 걔 결국 프리지아 들고 떠났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면서 청색 마이를 날리면서 교문을 넘었대 어른이 되고 싶어서 도서관 구석에서 책 뜯어먹던 것부터 걔가 꾸던 꿈을 생산하고 싶어서 따라다닌 것도 이해 해. 하지만 이렇게까지... 난 걔 등뒤에서 연분홍빛 수국으로 물드는 노을을 봤어 회색 백팩 지퍼 틈으로 삐져나와있는 푸른 잎도 봤지 걔는 말했어 새벽마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넣고 다닌다고. 이해 해, 다 이해한다구. 하지만 너도 알잖아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걔는 그저 꿈을 꾸는 공상과학자일뿐이야. 나는 믿어. 걔는 특별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스스로 정한 일에는 책임을 지는 아이니까. 그렇다고 너까지 떠나는 건 아니잖아. 아니. 나는 여기서 배운 것보다 걔와 함께했던 시간에서 배운 게 더 많아 인생은 우리.. 2021. 9. 1. 오랜만에 봄이 찾아온다고 한다 말번 감시원의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 간다 민둥산이 된 세상 잘린 밑동이 간지러워 아이는 밤마다 운다 집집마다 새싹을 피우겠다며 품 속에 흰 천을 마련해두고 퍼런 눈물을 흘리 운다 길 잃은 아이마냥 피붙이를 찾는 어미마냥 검어진 속을 뻘겋게 피우오면 다 함께 숨을 죽이고 숨을 죽이고 숨을 죽여 날이 밝아오기만을 기다린다 3월 1일 동쪽 하늘 위로 힘차게 해가 솟구쳐 오른다. 2021. 7. 18. 첫회식 한 손으로 담뱃갑을 꾸긴다 마치 대학교 때 버리고 온 단칸방처럼 시대는 달고 달아서 낡아버렸고 더 오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술은 잔을 채우며 곤두박질친다 “자네 이슬을 마시겠는가.” “이슬은 새벽에만 마실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그럼 오늘도 야근이군요.” “아니지. 철야겠지.” “아...” “밤이 줄어들수록 늘어나는 것이 있으니 빈 병과 빈 잔과 빈자리들 새벽은 그렇게 빈 것들을 주우러온다네.” “밤을 지새우는 동지여. 안주로 회 어떤가?” “해는 아침에만 뜨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럼 오늘도 집에 못 들어가겠군요.” “아니지. 우리 일터가 집이 아닌가.” “아...” “자-자- 자네 잔이 비였지 않는가 어서 술을 채우게 밤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네 한 잔이라.. 2021. 5. 16. 월요일 밤부터 혼났다 1 정수기에 물통을 꽂아놓고는 접시를 닦는 점원과 접시를 정리하는 점장님 - 곧 물통에 물이 넘칠 것 같습니다만 불안한 세상 세상이 조각나 있어 계속 한쪽 눈을 비비는 현상 지금 여기는 같은 말이 같은 말을 만들고 같은 행동이 같은 행동을 만들어내는 회식자리 - 술에 취한 것일까요 - 정말 취한 것일까요 - 봄이 오고 있다는데 - 이 설원 한 잔때문에 - 겨울이 가는 건 아니겠죠 카드의 숫자들이 줄어 줄어든 만큼 나이가 늘어 직급이 높아질수록 착해져야 하는 이유와 취할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와 회식자리가 줄어들수록 자리를 늘리려는 이유와 술이 느는 이유 - 늦었습니다 - 이러다 막차를 놓치겠어요 - 저는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 달립니다 지하철을 타야 합니다 2 늦은 시간 지하철에는 사람들이 많아 의자 .. 2021. 5. 16. 진지한 젊은이 자신의 몸보다 큰 의자에 앉아 꼬마가 웃으며 물었다. "젊은이여, 그대는 무엇에 위해 그리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가?" 빛이 들지 않는 높은 칸막이벽 아래 희미한 전등불이 비추고 그 아래 침침한 모니터 화면 속으로 수십 개의 프로젝트 폴더를 아래로 밀어 멈추지 않는 타자기 아래로 놓인 수백 개의 의자들 밑에 쩌든 슬리퍼가 어지럽게 침전하는 무의미한 시간들 다 버려진 것이다, 젊음은. 아무리 일을 하고 술을 마셔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아 목표는 업무를 줄이는 것 가끔 심장이 답답해지면 피난계단으로 피해 쭈그려앉아 한약을 먹어 아침마다 약을 먹어 약통을 늘려 병원에서는 아프다는데 아픈 지 도통 모르겠어 웃을 일을 만들기 위해 돈을 벌어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웃음을 잃어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웃음 이젠 돌.. 2021. 5. 16. 리시안셔스 낡은 빌딩 아래 지하궁전 어둡고 침침한 불빛 아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보이는 유리 상점 겹겹이 서로를 안고 의지하는 꽃들 사이로 영롱히 빛나는 꽃, 리시안셔스 그리웠던 그대를 만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버티었던가 오-나의 리시안셔스 그대의 환한 얼굴이 언제 이렇게 주름졌던가 어느 악마의 실수인지는 모르나 그대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소 자- 어서 내 손을 잡으시오 리시안셔스 나 그대를 이 지옥같은 지하감옥에서 탈출시킬 것이니 나 여기 한 다발 사랑의 주문을 외우오 그대여 이 마르지 않는 유리병에 발을 담그오 저기 이름 모를 야생초들이여 나의 리시안셔스와 함께해주겠소 나 여기 한 다발 사랑의 대가를 치르니 지하 세계를 지키는 간수들이여 길을 열어주시오 나 그대를 품에 안고 집으로 가 둥근 식탁에.. 2021. 5. 16. Volaré 성곽을 쌓아올린 자들의 두려움을 지키는 자 당신은 유리매스속에 켜진 벽부등처럼 서있어요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매일 일만 하고 있잖어요 volare volare 제 손을 잡아요 봄이 왔어요 봄의 색깔은 도시의 아스팔트 사이에도 물들어 있어요 철탑에 오르려 하지말아요 당신은 목련꽃처럼 여리게 매달려 있을 뿐이에요 낮인데 그대로 불을 끄고 잠이 들건가요 volare volare 제 손을 잡아요 봄이 왔어요 봄의 향기는 도시의 구둣발 사이에도 차올라 있어요 당신. 사랑의 달콤함을 믿어요 봄을 이해해요 당신과 같이 아름다운 봄을 말하고 싶어요 당신 악기를 연주해 감미로운 사랑을 노래하고 싶어요 volare volare 제 손을 잡아요 봄이 왔어요 봄의 날개가 도시의 빌딩 위에서 날아다니고 있어요 돋아나요 이제 v.. 2021. 5. 8. 오느래 희망 1. 작은 숲이 도시로 배달되어 왔다 오래된 감지에 쌓여 도착했다 끈을 푸는 순간 풀들이 튀어나와 방 안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이 신비한 야생의 버라이어티 어느새 숲 속이 되어있는 것이다 내 곁으로 두 아이가 달려온다 하루 종일 숲 속의 꽃들에게 물을 주고 품 속 가득 풀을 안고 돌아오는 시간 아버지는 한 뼘 더 자라나 산처럼 변해 있다 2. 작은 숲을 화면 속으로 가져오는 방법 광활한 숲 속에 작은 나무집을 짓는다 긴 테이블 위에서 어른들은 밀대를 밀면서 마법을 시전하고 아이들은 바닥을 빗자루로 밀면서 마법을 배운다 피아노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몇 술의 웃음소리가 섞여 반죽이 되어가는 오늘 숲 속의 열매들이 몸을 씻고 품 속으로 들어가 잠이 드는 시간 어머니는 겨울밤 아궁이에 불을 지피듯 따듯한 .. 2021. 5. 2. 바람이 사는 곳 초봄 이른 아침 집을 나선다 마을 뒷동산 새들이 날아드는 곳 산짐승과의 경계 아무렇게나 쌓아올린 돌담 사이로 발소리 많아지면 꽃이 흐트러지는 곳 그가 자주 지나던 곳 햇살도 쉬어 가는 곳 푹- 꺼진 무덤 앞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나비가 날아드는 곳 그 너머에 울창한 나뭇 사이로 어둠이 가라앉은 곳 한 발 더 다가서면 낮과 밤 경계가 사라지는 곳 침묵이 시작되는 곳 그가 처음 태어난 곳 언제나 어디서나 눈을 감으면 보이는 곳 그가 사는 곳 바람이 사는 곳 모든 곳이 시작되는 곳 그 곳으로 가는 것이다. 2021. 5. 2.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