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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 절정 매운 계절(季節)의 챗죽에 갈겨 마츰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리빨 칼날진 그우에서다 어데다 무릎을 꾸러야하나? 한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깜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된 무지갠가보다. 2021. 6. 23.
기형도 - 바람의 집_겨울 판화 1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우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 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 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 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2021. 6. 2.
겨울은 길고 봄은 짧고 새는 날아올라 겨울과 봄 사이 그대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면 이상은의 새를 들어 겨울은 길고 봄은 짧고 새는 날아올라 여름이 오고 가을은 떨어져 바닥에 눕네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면 새는 날아가고 누군가에게는 점이 되고 있어 너도 저 새처럼 구름 속을 헤엄치고 싶다면 장롱 속에서 청자켓을 꺼내 입어 두 팔을 크게 벌리고 들판을 달려 나가면 바람이 찾아와 풀들이 춤을 추고 너는 공중으로 날아올라 새가 될 거야 자유로운 새가 되어 아름다운 곳으로 날아가 무사히 겨울을 나고 돌아올 땐 봄을 찾아오는 거야 입 안 가득 점을 물고서 이 메마른 땅에 씨앗을 뿌려줘 겨울은 길고 봄은 짧고 새는 날아올라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면 새는 날아가고 누군가에게는 점이 되고 있어 겨울은 길고 봄은 짧고 새는 날아올라 여름이 오고 가을은 .. 2021. 5. 16.
목도리 한겨울 내 키만큼이나 긴 그대 팔을 두르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립니다 내 품 속에서 포근히 잠든 그대를 두 팔로 꼭 끌어안고 오지 않는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와 함께 였던 따듯한 겨울을 기다립니다 2021. 5. 16.
구름운(雲) 고즈넉이 안개 낀 산마루를 보며 아버지는 새해를 맞습니다 겨울 농촌의 아침은 으스스한 옷을 걸치고 불을 지피러 가는 일 신문지에 불을 붙여 아궁불 드리우면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나고 어느새 내리는 눈은 흰나비처럼 나풀거려 쪼그리고 앉아 멍하니 불을 지키는 아버지 아버지, 요즘은 좋아하던 텔레비도 흐릿해져 누워서만 듣는다지요 아들 졸업식날 맨 뒷자리에 말없이 서 계시던 아버지 연신 지 살을 떼어주는 줄도 모르고 내리는 저 눈처럼 아무도 오지 않는 눈길을 아무도 오지 않는 길목을 하염없이 쓸고 계시는 아버지 점점 피어오르는 눈안개 속으로 흐려져가는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구름처럼 부풀어올라 먹먹해져 갑니다. 2021. 5. 16.
서시 나는 세상에 흩어진 파편들로 글을 쓴다 내 글에는 어떠한 운율도 색깔도 없다 맛도 향도 사상도 없다 다만 계속해서 쓸어 담을 뿐, 한 가지로 정의되지 않는 그런 그리하야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무명의 존재로 무덤에 간다 그곳은 나만의 곳이다 내가 읽었던 자들이 있는 곳 영원히 살아 숨 쉬는 곳 비유가 마구 샘솟는 곳 나는 자주 죽는다 그리하야 한 장씩 복사-붙여 넣기를 한다 죽는 날까지- 날 읽기 시작한 나에게 영원히 끝나지 않는 무덤을 마련해두고 하나의 소재로 누군가의 가슴에 달리는 펜던트처럼 나는 계속 나를 쓴다. 2021. 5. 16.
겨울, 현관문을 열며 겨울, 현관문을 열며 낙엽 몇이 춥다며 따라 들어옵니다 멍멍이는 반갑다며 꼬리를 흔들고 창문 턱에 양이는 새근새근 잠이 들었습니다 그 아래 가지런히 놓인 화분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있고 거실 쪽에 붙어 몸을 녹이는 신발들 그 옆에 나란히 내 눈 덮인 신을 벗으며 조용히 거실문을 엽니다 두툼한 이불속에 몸을 집어넣고 익어가는 동치미 무수알처럼 다 함께 둥글게 모여 앉아 티비를 보는 식구들 나는 그 속으로 달려가 푹- 하고 발을 밀어 넣었습니다 1998년 겨울 어느 산골마을에 느릿느릿 눈이 내리는 가운데 거실 창으로 새어 나오는 구수한 불빛에 푹- 푹- 익어가던 시절 어린 나로부터의 추신. 2021. 5. 2.
담쟁이 올해는 아무도 찾지 않는 장례식장이 호황이었다 주가는 치솟았고 자영업자들은 줄줄이 망했으며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그 벽앞에서 무너지기 일쑤였다 단단히 서로의 손을 잡고 견디는 저 담쟁이처럼 묵묵히 한단씩 벽을 오르다보면 언젠가 막막했던 저 벽도 누구나 쉬- 넘을 수 있듯이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이 겨울을 이겨내야만 한다 한 뼘 더 자라기 위해 손을 뻗는 저 담쟁이처럼 조금씩 한사람씩 손을 뻗으면 언젠가 막연했던 저 벽도 누구나 쉬- 무너뜨릴 수 있듯이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한발씩 이 어둠을 헤쳐나가야만 한다 도종환 담쟁이 인용 2021. 5. 2.
보리차 어느새 날이 많이 추워진 듯합니다 그곳은 여기보다 더 춥겠지요 도시는 눈이 많이 내렸음에도 도로 위에 차들로 가득합니다 너무도 많은 일들과 너무도 많은 사람들 너무도 많은 불빛과 너무도 많은 뉴스들 너무도 많은 집들과 너무도 많은 음식들 이곳의 하루는 더부룩하기만 합니다 화려한 도시를 지나 비슷한 방들로 이어진 통로를 지나 철제문을 열고 들어서면 차갑게 식어있는 단칸방과 어제 먹다 남은 인스턴트 음식과 페트병 속 반쯤 남은 생수와 나 오늘같이 추운 날이면 속 따스히 뎁히라며 책상 위에 올려놓으시던 보리차 모락모락 김이 나던 어머니의 보리차가 생각납니다 늦은 시간까지 우리를 기다리시던 피-소리를 내며 끓는 주전자 속 금빛으로 물들던 훈훈한 보리알처럼 아랫목에서부터 솟아나는 어머니, 어머니의 따듯한 보리차가.. 2021.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