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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노루 장진(長津) 땅이 지붕 넘에 넘석하는 거리다 자귀나무 같은 것도 있다 기장감주에 기장차떡이 흔한데다 이 거리에 산골 사람이 노루 새끼를 데리고 왔다 산골 사람은 막베 등거리 막베 잠방둥에를 입고 노루 새끼를 닮았다 노루 새끼 등을 쓸며 터 앞에 당콩 순을 다 먹었다 하고 서른닷 냥 값을 부른다 노루 새끼는 다문다문 흰 점이 박히고 배안의 털을 너슬너슬 벗고 산골 사람을 닮았다 산골 사람의 손을 핥으며 약자에 쓴다는 흥정 소리를 듣는 듯이 새까만 눈에 하이얀 것이 가랑가랑한다 2021. 5. 25.
백석 - 여승(女僧)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2021. 5. 25.
백석 -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 2021. 5. 24.
백석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2021. 5. 24.
옷걸이 이 시간만을 기다려왔습니다만 당신은 옷걸이에 옷을 걸어두라 합니다 내 상의고 바지고 넥타이고 일하고 왔습니다만 내가 고생한 만큼이나 쉬고 싶을 것인데 매정하게도 옷걸이에 걸라하십니다 나는 이따금씩 옷들을 펴서 푹신한 침대에 눕혀줍니다 나 또한 그대로 소파에 누워 텔레비를 봅니다 가끔은 그대로 잠이 들어도 괜찮지않습니까만 일요일이면 옷들은 세탁기 속에서 돌려집니다 내가 회사에서 돌려지는 것처럼 온 몸이 다 젖고서야 퇴근을 한답니다 나를 지탱해주기 위해 다시 날을 세우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다시 더렵혀지고 나를 위해 무급 연봉 계약을 하고 그대로 옷걸이 걸려 잠이 듭니다 나를 위해 더 이상 쓸모 없어질 때까지 옷걸이에 걸려 집니다 축 처진 상태로 낡아갑니다 2021. 5. 23.
이상 - 종생기(終生記) 극유산호(郤遺珊瑚)— 요 다섯 자(宇) 동안에 나는 두 자 이상의 오자를 범했는가 싶다. 이것은 나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할 일이겠으나 인지가 발달해가는 면목이 실로 약여하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산호(珊瑚) 채찍일랑 꽉 쥐고 죽으리라. 내 폐포파립(廢袍破笠) 우에 퇴색한 망해 우에 봉황이 와 앉으리라. 나는 내 '종생기(終生記)'가 천하 눈 있는 선비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놓기를 애틋이 바라는 일념 아래의만큼 인색한 내 맵씨의 절약법을 피력하여보인다. 일발포성(一發砲聲)에 부득이 영웅이 되고 만 희대의 군인 모(某)는 아흔에 귀를 단 황송한 일생을 끝막던 날 이렇다는 유언 한 마디를 지껄이지 않고 그 임종의 장면을 곧잘 (무사히 후― 한숨이 나올 만큼) 넘겼다. 그런데 우리들의 레우오치카—.. 2021. 5. 22.
이상 - 권태 1 어서, 차라리 어두워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돼먹었노? 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십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쿨,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대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김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흰둥이, 검둥이. 해는 백 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내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2021. 5. 22.
이상 - 날개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 — 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 — 만을 영수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되고 그만둔 모양이오.. 2021. 5. 21.
이상 - 이런 시 역사(役事)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여놓고보니 도모지어데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木徒)들이 그것을메고나가드니 어데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 위험(危險)하기짝이없는 큰길가드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얐으니 필시(必是)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변괴(變怪)로다 간데온데없드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처량(悽凉)한생각에서아래와같은작문(作文)을지였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든 그대여 내한평생(平生)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골을 물끄러미 치여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詩)는그만찢어버리고싶드라 2021. 5.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