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회식 한 손으로 담뱃갑을 꾸긴다 마치 대학교 때 버리고 온 단칸방처럼 시대는 달고 달아서 낡아버렸고 더 오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술은 잔을 채우며 곤두박질친다 “자네 이슬을 마시겠는가.” “이슬은 새벽에만 마실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그럼 오늘도 야근이군요.” “아니지. 철야겠지.” “아...” “밤이 줄어들수록 늘어나는 것이 있으니 빈 병과 빈 잔과 빈자리들 새벽은 그렇게 빈 것들을 주우러온다네.” “밤을 지새우는 동지여. 안주로 회 어떤가?” “해는 아침에만 뜨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럼 오늘도 집에 못 들어가겠군요.” “아니지. 우리 일터가 집이 아닌가.” “아...” “자-자- 자네 잔이 비였지 않는가 어서 술을 채우게 밤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네 한 잔이라.. 2021. 5. 16. 월요일 밤부터 혼났다 1 정수기에 물통을 꽂아놓고는 접시를 닦는 점원과 접시를 정리하는 점장님 - 곧 물통에 물이 넘칠 것 같습니다만 불안한 세상 세상이 조각나 있어 계속 한쪽 눈을 비비는 현상 지금 여기는 같은 말이 같은 말을 만들고 같은 행동이 같은 행동을 만들어내는 회식자리 - 술에 취한 것일까요 - 정말 취한 것일까요 - 봄이 오고 있다는데 - 이 설원 한 잔때문에 - 겨울이 가는 건 아니겠죠 카드의 숫자들이 줄어 줄어든 만큼 나이가 늘어 직급이 높아질수록 착해져야 하는 이유와 취할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와 회식자리가 줄어들수록 자리를 늘리려는 이유와 술이 느는 이유 - 늦었습니다 - 이러다 막차를 놓치겠어요 - 저는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 달립니다 지하철을 타야 합니다 2 늦은 시간 지하철에는 사람들이 많아 의자 .. 2021. 5. 16. 겨울은 길고 봄은 짧고 새는 날아올라 겨울과 봄 사이 그대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면 이상은의 새를 들어 겨울은 길고 봄은 짧고 새는 날아올라 여름이 오고 가을은 떨어져 바닥에 눕네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면 새는 날아가고 누군가에게는 점이 되고 있어 너도 저 새처럼 구름 속을 헤엄치고 싶다면 장롱 속에서 청자켓을 꺼내 입어 두 팔을 크게 벌리고 들판을 달려 나가면 바람이 찾아와 풀들이 춤을 추고 너는 공중으로 날아올라 새가 될 거야 자유로운 새가 되어 아름다운 곳으로 날아가 무사히 겨울을 나고 돌아올 땐 봄을 찾아오는 거야 입 안 가득 점을 물고서 이 메마른 땅에 씨앗을 뿌려줘 겨울은 길고 봄은 짧고 새는 날아올라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면 새는 날아가고 누군가에게는 점이 되고 있어 겨울은 길고 봄은 짧고 새는 날아올라 여름이 오고 가을은 .. 2021. 5. 16. 진지한 젊은이 자신의 몸보다 큰 의자에 앉아 꼬마가 웃으며 물었다. "젊은이여, 그대는 무엇에 위해 그리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가?" 빛이 들지 않는 높은 칸막이벽 아래 희미한 전등불이 비추고 그 아래 침침한 모니터 화면 속으로 수십 개의 프로젝트 폴더를 아래로 밀어 멈추지 않는 타자기 아래로 놓인 수백 개의 의자들 밑에 쩌든 슬리퍼가 어지럽게 침전하는 무의미한 시간들 다 버려진 것이다, 젊음은. 아무리 일을 하고 술을 마셔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아 목표는 업무를 줄이는 것 가끔 심장이 답답해지면 피난계단으로 피해 쭈그려앉아 한약을 먹어 아침마다 약을 먹어 약통을 늘려 병원에서는 아프다는데 아픈 지 도통 모르겠어 웃을 일을 만들기 위해 돈을 벌어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웃음을 잃어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웃음 이젠 돌.. 2021. 5. 16. 목도리 한겨울 내 키만큼이나 긴 그대 팔을 두르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립니다 내 품 속에서 포근히 잠든 그대를 두 팔로 꼭 끌어안고 오지 않는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와 함께 였던 따듯한 겨울을 기다립니다 2021. 5. 16.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안고 뽀뽀하고 멈출 수가 없어 너와의 저녁 시간 너는 내 손가락을 먹고 코를 깨물어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너와의 시간 허리가 나가고 팔이 떨어질 것 같아도 네가 한번믄 웃어준다면 그 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 너는 나의 미래야 너는 나의 바다야 너는 나의 희망이야 매일 같은 노래를 불러도 매일 같이 춤을 추어도 네가 한번만 웃어준다면 그 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 너는 나의 미래야 너는 나의 우주야 너는 나의 사랑이야 내 모두를 주어도 아깝지 않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 너는 나의 미래 나의 바다 나의 우주 너는 나의 희망 나의 사랑 나의 아들 눈이 넣어도 아프지 않아 2021. 5. 16. 구름운(雲) 고즈넉이 안개 낀 산마루를 보며 아버지는 새해를 맞습니다 겨울 농촌의 아침은 으스스한 옷을 걸치고 불을 지피러 가는 일 신문지에 불을 붙여 아궁불 드리우면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나고 어느새 내리는 눈은 흰나비처럼 나풀거려 쪼그리고 앉아 멍하니 불을 지키는 아버지 아버지, 요즘은 좋아하던 텔레비도 흐릿해져 누워서만 듣는다지요 아들 졸업식날 맨 뒷자리에 말없이 서 계시던 아버지 연신 지 살을 떼어주는 줄도 모르고 내리는 저 눈처럼 아무도 오지 않는 눈길을 아무도 오지 않는 길목을 하염없이 쓸고 계시는 아버지 점점 피어오르는 눈안개 속으로 흐려져가는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구름처럼 부풀어올라 먹먹해져 갑니다. 2021. 5. 16. 리시안셔스 낡은 빌딩 아래 지하궁전 어둡고 침침한 불빛 아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보이는 유리 상점 겹겹이 서로를 안고 의지하는 꽃들 사이로 영롱히 빛나는 꽃, 리시안셔스 그리웠던 그대를 만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버티었던가 오-나의 리시안셔스 그대의 환한 얼굴이 언제 이렇게 주름졌던가 어느 악마의 실수인지는 모르나 그대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소 자- 어서 내 손을 잡으시오 리시안셔스 나 그대를 이 지옥같은 지하감옥에서 탈출시킬 것이니 나 여기 한 다발 사랑의 주문을 외우오 그대여 이 마르지 않는 유리병에 발을 담그오 저기 이름 모를 야생초들이여 나의 리시안셔스와 함께해주겠소 나 여기 한 다발 사랑의 대가를 치르니 지하 세계를 지키는 간수들이여 길을 열어주시오 나 그대를 품에 안고 집으로 가 둥근 식탁에.. 2021. 5. 16. 어느 초현실주의 작가의 그림 : 변함없이 아름답게 그림을 보여주기 전에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지오반니를 틀어놓는다 배 위에는 대못으로 고정된 유리컵이 놓여있고 그 안에는 바다가 담겨있다 파도가 일지않는 바다에는 침묵만이 산다 침묵은 만년필과 노트다 물속에서는 아무 것도 써지지 않는다 그 뒤로 의자에 숫사슴이 앉아있다 두 발과 다리를 초조하게 모으고서 투박하게 두 손으로 유리컵을 잡고 두 눈을 부릅뜨고 안을 들여다본다 사슴의 상반신은 F5호 캔버스에 들어가 있다 사슴의 머리에 난 뿔은 액자의 프레임을 뚫고 벽지를 타고 지붕을 뚫고 하늘 위로 뻗어간다 하늘에는 해가 떠있고 달이 떠 있으며 구름이 걸려 있고 별이 반짝이고 있다 하늘 윗면에 흰 꽃이 즐비하게 놓이고 젖은 연기가 춤을 추며 그림을 그린다 문이 없는 이 미술관의 바닥에 그려진 이 그림은 돈 지오반.. 2021. 5. 16.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 1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