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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편 도대체 구름은 물을 먹고 왜 먹먹해지는 걸까 늘어난 먹구름들이 노을에 발을 담근다 온탕에 불그레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훗날 그것은 울음소리가 되겠지만 노인들이 노약자석을 찾아 노을 진 곳으로 간다, 새들이 하늘을 배회하다 노을에 빠져 죽는 것과 같이. 바람이 노을을 가지고 사라진다. 가을, 바람의 연료는 무엇인가 푸른 나무를 송두리째 훑고 달아나는 바람 잎들이 노을에 젖어 탈색되고 여인들은 가을 옷을 꺼내 입고 사람들은 도시에서 시골 산천으로 떠난다 바람이 들판 위에 노을을 뿌리면 금빛으로 물드는 세상 아이와 멍멍이는 꼬리를 흔들며 데구루루 어른들은 바구니를 들고 와 이삭을 줍는다 서서히 내리는 어둠 곧 밤이 세상을 삼킬 것이다 바람은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돗자리와 찐 감자와 옥수.. 2021. 5. 2.
가을 이사 가을에는 나무 곁에서 잎들이 이사를 갑니다 나뭇가지 위에 새처럼 날아갑니다 훨훨 훨훨 바람에 짐을 신고 훨훨 훨훨 손을 흔들면서 하나둘 말없이 떠나갑니다 나무의 손끝에는 파란 그리움이 그리움만이 매달려 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만 남기고 가버린 사랑 이별은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끝없는 침묵 속으로 우리를 끌고 내려갑니다 나무는 그대로 서서 야윈 팔을 흔들며 늦은 인사를 합니다 사랑의 또 다른 방식을 배웁니다 조용히 너무나도 조용히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우리들은 침묵을 사랑을 이별을 배웁니다 가을에는 모두가 이사를 갑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정처 없이 떠나갑니다 혼자 외로움을 배웁니다. 2021. 5. 2.
폭풍우 이 폭풍우가 그치고 나면 김 서린 차창너머로의 세상은 가을로 변하겠지요 당신이 떠난 날처럼 한순간에 말이에요 매서운 바람이 잔잔해지면 나무는 푸른 등에 불을 끄고 이명에 걸린 사람처럼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될 거예요. 당신이 말한 슬픔으로 붉은색 노란색 검은색으로 떨어지고 나면 당신의 사랑도 힘을 다 하겠죠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이 낙엽이 떨어지고 나면 어김없이 당신은 이 잎을 밟고 가겠지요 거리에는 먼지같은 사랑이 많아요 가볍게 저버린 사랑 전 아무 것도 잊지 않을거예요 숨을 깊이 들이 마시고 마음의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킬 거예요 오래도록 당신과 나눈 말들이 멀리까지 닿을 때까지 그 폭풍 같던 사랑을 다시 한번 꿈 꿀 거예요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이 폭풍우가 그치고 나면. 2021. 5. 2.
수목장 _ 2012년 8월 소낙비 우니 꽃잎이 떨어지고 내 꽃님은 말없이 슬픔을 두고 멀어져 가네 _ 여름날 나무 그늘 아래 너를 묻어두고 돌아오는 길 여인의 눈물소리 바람에 실려 흰 구름에 먹을 칠해 다시금 호수공원 위로 떨어지는 비 여인은 발길을 돌려 돌아가는 길 미련한 사내는 비 내리는 어둠 속에서 숫자만을 되세이고 너는 가만히 넓은 잎을 펼쳐 두 사람의 우산이 되어주었네 한차례 소낙비가 끝나고 돌아가는 여인의 모습에는 한참 피울 꽃 나이에 없는 슬픔이 보여 사내는 젊은 사내를 그대로 세워두고 여름날 비가 계속 되는날이면 혹여나 떠내려가지 않을까 그곳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었네 - 매년 호수공원 위로 비가 내리면 꽃잎이 지고 나무는 거대한 잎을 펼쳐. 영화 편지 중에서 2021. 5. 2.
겨울, 현관문을 열며 겨울, 현관문을 열며 낙엽 몇이 춥다며 따라 들어옵니다 멍멍이는 반갑다며 꼬리를 흔들고 창문 턱에 양이는 새근새근 잠이 들었습니다 그 아래 가지런히 놓인 화분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있고 거실 쪽에 붙어 몸을 녹이는 신발들 그 옆에 나란히 내 눈 덮인 신을 벗으며 조용히 거실문을 엽니다 두툼한 이불속에 몸을 집어넣고 익어가는 동치미 무수알처럼 다 함께 둥글게 모여 앉아 티비를 보는 식구들 나는 그 속으로 달려가 푹- 하고 발을 밀어 넣었습니다 1998년 겨울 어느 산골마을에 느릿느릿 눈이 내리는 가운데 거실 창으로 새어 나오는 구수한 불빛에 푹- 푹- 익어가던 시절 어린 나로부터의 추신. 2021. 5. 2.
담쟁이 올해는 아무도 찾지 않는 장례식장이 호황이었다 주가는 치솟았고 자영업자들은 줄줄이 망했으며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그 벽앞에서 무너지기 일쑤였다 단단히 서로의 손을 잡고 견디는 저 담쟁이처럼 묵묵히 한단씩 벽을 오르다보면 언젠가 막막했던 저 벽도 누구나 쉬- 넘을 수 있듯이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이 겨울을 이겨내야만 한다 한 뼘 더 자라기 위해 손을 뻗는 저 담쟁이처럼 조금씩 한사람씩 손을 뻗으면 언젠가 막연했던 저 벽도 누구나 쉬- 무너뜨릴 수 있듯이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한발씩 이 어둠을 헤쳐나가야만 한다 도종환 담쟁이 인용 2021. 5. 2.
보리차 어느새 날이 많이 추워진 듯합니다 그곳은 여기보다 더 춥겠지요 도시는 눈이 많이 내렸음에도 도로 위에 차들로 가득합니다 너무도 많은 일들과 너무도 많은 사람들 너무도 많은 불빛과 너무도 많은 뉴스들 너무도 많은 집들과 너무도 많은 음식들 이곳의 하루는 더부룩하기만 합니다 화려한 도시를 지나 비슷한 방들로 이어진 통로를 지나 철제문을 열고 들어서면 차갑게 식어있는 단칸방과 어제 먹다 남은 인스턴트 음식과 페트병 속 반쯤 남은 생수와 나 오늘같이 추운 날이면 속 따스히 뎁히라며 책상 위에 올려놓으시던 보리차 모락모락 김이 나던 어머니의 보리차가 생각납니다 늦은 시간까지 우리를 기다리시던 피-소리를 내며 끓는 주전자 속 금빛으로 물들던 훈훈한 보리알처럼 아랫목에서부터 솟아나는 어머니, 어머니의 따듯한 보리차가.. 2021. 5. 2.
눈의 색깔 3 그리고 추운 겨울 눈이 흰 이유는 당신의 빨개진 볼과 차가워진 손을 보기 위하여 그 손을 잡고 내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서 매서운 눈보라 속을 나아가기 위하여 추운 겨울 흰 눈이 내리네 우리의 사랑은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 두터운 이불로 된 하나의 색동옷을 입었네 삼신할미가 점지해준 사랑 흰 속싸개에 쌓여 이 겨울 포근한 불씨 하나를 얻었네 어떠한 추위가 와도 우리는 따듯하다네 그리하여 나는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2021. 5. 2.
눈의 색깔 2 그리고 뉴스에서는 올해 한 번도 눈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눈은 오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상관없이 어느 날에는 환하게 웃다가 어느 날에는 구석에 쌓여 울어 또 어느 날엔 신나게 말을 걸다가도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너 한 해가 다 가도록 연락도 없더니 불현듯 나타나 내 앞에 서있던 너 처음 너와 눈을 맞고, 너와 입을 맞추고, 너와 이불을 덮고, 너와 녹아내려 몇 날 며칠을 보내어도 부족했던 시간을 지나 네 눈 밖에 난 후로 나의 뉴스에서는 계속 눈이 오고 있다고 아무도 볼 수 없는 눈이 오고 있다고 이 내리는 눈은 나만 맞을 수 있다고 나의 뉴스에서는 올해 계속 눈이 오고 있다고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상관없이 투명한 눈이 오고 있다. 2021. 5. 2.